Historical Studies on Scientific Research of Mycologist Sam Soon KIM

ORIGINAL ARTICLE
선 유정  You-Jeong Sun1Geun Bae Kim2*

Abstract

Sam Soon KIM was a female scientist who pioneered mycology in South Korea. She not only created the Korean Society of Mycology and the Korean Journal of Mycology but also achieved extraordinary results in the studies of mycology. After returning from Kyushu University in Japan in 1966, she turned her attention to the applied research of microorganisms. Kim pursued an earnest exploration of the practical values of bacteria in addition to those of fungi and mushrooms. Then, with the founding of the Korean Society of Mycology in 1972, she emerged as the central figure in the rare academia of mycology. Particularly, mushroom research, which had been stagnant, became revitalized by the joining of researchers from the Rural Development Administration. Taking this as momentum, Kim moved beyond applied research, such as mushroom cultivation, and led the mushroom name unification plan from 1978. She also studied mushroom classification and eventually launched publishing an illustrated book of mushrooms. These fruits of her long-term research trajectory led her to be known as a mushroom expert.

Keyword



1. 과학활동의 새로운 추구

“농촌에서 태어나 살면서 항상 느껴오던 그들의 빈약한 식생활 개선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또 여자로서 험하게 돌아다니지 않아도 실험실에서 재료를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응용균학을 하게 되었다.” [1]

과학 공간의 이동은 과학활동의 커다란 변동을 수반하기도 한다. 1966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김삼순은 오로지 일본에서 과학 경험을 쌓았다. 일제강점기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재학부터 연구과, 규슈제국대학 이학부 조수, 홋카이도제국대학 식물학과 재학, 홋카이도제국대학 대학원, 해방 이후 홋카이도대학과 규슈대학 농학부 연구생에 이르기까지 그 기간만 해도 약 15년에 달한다. 도중에 과학활동이 수시로 중단되고 그 기간이 길어져 나이로 따지면 19세부터 57세까지로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있다 [2]. 이런 그가 새로운 공간인 한국으로 돌아옴에 따라 과학활동은 어떻게 달라졌고 어떤 과학적 성취를 거두었을까?

1960-70년대 한국의 대학 연구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과학연구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적, 인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었다. 연구비를 비롯하여 연구설비, 연구인력, 연구정보 등 어느 하나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이러한 조건에서도 김삼순은 과학연구에 대한 열정을 이어가고자 힘썼다. 최신의 연구설비가 없어도, 적은 연구비만을 확보해도 가능한 연구주제를 지속해서 탐색하여 나갔다. 당시는 최소한의 재정 지원이라도 받으려면 정부가 관심을 가질 응용 성격의 과학연구여야 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 그의 연구 궤적은 과학적 여건과 사회적 필요를 함께 고려하며 ‘좁은 미로’를 끊임없이 찾아 나가는 양상을 띠었다.

사실 일본에서 그는 대학의 연구실에 근무하며 순수 연구를 추구했다. 좋은 여건에서 지도교수가 제시한, 때로는 자신이 선택한 새롭고 중요하다고 여긴 학문적 주제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것도 지도교수의 도움을 받아 혼자서 수행하는 개인연구 방식이었다. 연구결과는 학위논문으로 발표하거나 우수하다고 인정받는 과학저널에 출간했다. 영미권의 세계적인 과학저널에 연구논문을 게재하는 것에도 관심을 크게 기울였다. 반면에 이 과정에서 혹은 이후에 자신의 연구성과를 활용하려는 진지한 노력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과학의 발전에 기여하려는 생각으로 과학의 보편성을 지닌 ‘순수한 과학자’로 활동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그의 과학연구가 완전히 달라졌다. 한국사회에서 필요하다고 여긴 응용연구에 치중했다. 그는 연구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자주 필드로 나갔고 여러 연구자들과 협력하며 공동연구를 수행했다. 서로 다른 기관에 종사하는 연구자들과 합심해서는 새로운 과학단체를 만들고 그 빠른 정착을 위해 전면에 나서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과학연구에 많은 시간을 지속해서 기울였지만 연구논문을 해외의 유명 과학저널에 발표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국가와 국민에 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도록 과학의 지역성을 추구한 ‘실천적인 과학자’로 변신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과학연구에 신심(信心)을 지닌 사람이었다. 배우는 과정에서는 물론 한국에서 교수가 된 이후에도 과학연구에 헌신하며 평생을 그에 정진했다. 그의 이력을 보면 1968년 서울여대 교수가 된 후 그의 나이 72세가 되는 1981년까지 연구성과를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스스로도 매년 적어도 1편의 논문을 꾸준히 쓰려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 이후부터 81세가 되는 1990년까지는 버섯도감 준비와 출간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그의 과학연구 궤적을 잘 들여다보지 않고 그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주변적인 서사가 된다.

그동안 김삼순에 대한 과학사 연구는 적은 편이고 특히 그의 과학연구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는 본 저자의 연구에서만이 한국 최초 여성 과학자의 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고, 다른 하나는 일본인 최초 여성 농학박사 쓰지무라 미치요(辻村 みちよ)와 성장 과정을 비교한 것이 있다 [2,3]. 김근배와는 공동으로 김삼순의 과학연구 중에서 구체적으로 느타리 연구와 그 사회적 확산을 다룬 논문이 있다 [4]. 김삼순을 직접 다룬 것은 아니나 그가 주도하여 만든 한국균학회의 창립과 초기 학술활동을 다룬 김희숙의 논문이 있어 참고할 만하다 [5].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연구로는 한국에서 그가 장기간에 걸쳐 수행한 과학활동과 그 의미를 충실히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이 연구는 김삼순이 한국에서 행한 과학연구의 궤적을 세부적으로 추적하고 이 속에서 그의 과학적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어 나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가 초기에 그렸던 과학의 꿈은 미생물을 이용한 연구를 통해 사회에 도움을 주자는 다분히 개인적이고 소박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개인적 연구가 빠르게 진전되고 다른 연구자들과의 교류가 확대됨에 따라 그의 과학연구는 다른 차원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바로 과학연구의 학문적 가치가 부각되며 응용연구와 더불어 기초연구도 그의 과학활동에서 중요성을 지녔다. 결국 그가 행한 과학연구가 어떤 과정을 통해 신생 과학분야인 균학의 정착이라는 새로운 흐름의 중요한 일부로 자리 잡아 나갔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2. 서울여자대학 임용과 응용미생물 연구

“콩을 발효시켜 만든 소화 흡수에도 좋고 영양가 높은 청국장을 만든다든지 단백질과 비타민이 많고 영양가가 높은 버섯을 재배하여 먹으면 영양섭취에 부족함이 없다.” [1]

김삼순은 전남 담양 출신으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1933년 일본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이과 선과를 수료했다. 몇 년간 교사 생활을 한 후에 그는 도쿄여고사 연구과와 규슈제국대학 이학부 조수를 거쳐 1943년 홋카이도제국대학 식물학과를 졸업했다. 해방 후 서울대 사범대학 교수로 있다가 일본유학을 위해 그만두고 1961년 홋카이도대학 농학부 연구생과 1963년 규슈대학 농학부 연구생으로 활동했다.

그는 아주 긴 과학 여정을 거쳐 1966년 일본 규슈대학에서 꿈에 그리던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여성 농학박사가 된 것이었다. 임호식이 1934년 홋카이도제국대학에서 한국인으로 첫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그로부터 30여 년이 훌쩍 지난 후였다. 그의 박사논문은 “다카아밀라제 A의 광불활성화”로 빛과 단백질 상호관계의 일례로 다카아밀라제 A에 자외선과 가시광선을 쬐었을 경우 광에너지가 어떻게 리보플래빈(비타민B2)을 증감시키고 화학에너지로 전환되어 가는지 그 물리적, 화학적 과정을 규명한 수작으로 관련 연구성과가 세계적 과학저널 『네이처』(Nature)에 2편이나 발표되었다 [6,7]. 그는 학부 이래로 미생물과 관련한 연구를 했으나 박사논문에서는 생물학은 물론 물리학, 화학이 걸쳐있는 융복합 연구주제를 다루었다.

박사학위를 받자 그는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1966년 9월 건국대학교 생물학과에 교수로 임용되었고 대학부설 응용미생물연구소를 세우는 일에 참여했다. 연구소 소장은 그가 아니라 당시 과학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젊더라도 남성 교수가 맡았다 [8]. 이 무렵 “여자교육을 같이하자”는 경성여고보 동문인 고황경 학장의 제의로 그는 1968년 서울여자대학으로 옮겼다. 어느덧 말년에 접어든 59세가 되었을 때였다. 그는 새로운 학과로 식품영양학과를 개설하고 대학부설 미생물연구소도 만들었다. 건국대 연구소와는 약간 다르게 이름 붙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나 얼마 후에는 그가 추구한 응용미생물연구소로 명칭을 바꾸었다 [9]. 그가 심혈을 기울인 박사논문과는 연구방향을 매우 다르게 설정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모델은 홋카이도대학 농학부의 응용균학 강좌였다. 그가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할 때 선택했고 1961년에 박사논문을 준비하려고 다시 찾아갔던 곳도 이곳이었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여러 인터뷰에서 이러한 점을 직접 밝히기도 했다. 물론 그는 홋카이도대학 응용균학 강좌에서 곰팡이를 다루기도 했으나 전공분야가 균학은 아니었고, 그것도 응용연구가 아니라 기초연구에 치중했다. 균학과 관련한 연구경력은 미미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초기에 연구분야를 설정할 때 사실은 응용균학도 아니고 응용미생물학을 사용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홋카이도대학 응용균학 강좌는 낫토균을 처음 순수배양에 성공한 한자와(半澤 洵)가 일본에서 선구적으로 개설하고 그 뒤를 사사키(佐佐木 酉二)가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한자와는 응용균학 강좌를 개설하기로 결정한 농학부 교수들의 요청으로 유럽에 가서 발효균학과 토양미생물학을 익히고 돌아와 강좌의 주임교수가 됐다. 당시 응용균학 강좌는 독립적인 건물을 세우고 최첨단 장비를 갖추며 농학부의 핵심 강좌로 여겨졌다. 특히 한자와가 연구비 확보를 위해 시작한 낫토균 순수배양이 성공하면서, 그의 강좌는 전국적으로도 지명도가 높아졌다. 1941년 한자와가 정년으로 퇴임한 후 사사키가 이어받았으나 그 명성은 그대로였고, 이 강좌에 김삼순이 합류했다. 응용균학 강좌에서 다룬 연구주제는 낫토균을 대표로 해서 토양미생물(질소고정세균), 식품미생물(젖산균), 공업미생물(누룩곰팡이) 등으로 강좌 명칭과는 다르게 사실은 세균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10]. 말하자면, 이 강좌에서 내걸고 있는 응용균학은 균학(mycology)이 아니라 세균학(bacteriology)을 포함한 미생물학(microbiology)의 응용연구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김삼순은 서울여대에서 연구소 이름을 지을 때 균학이 아니라 정확하게 미생물연구소로 명명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은 미생물학이 초기 제도화 과정을 거치고 있던 시기였다. 균학에 대한 미생물학계의 관심은 연구 대상에 따라 크게 달라, 곰팡이와 효모는 시선을 끌었으나 버섯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미생물학회에 참여하고 있던 균학 연구자들은 주로 식품 관련 곰팡이 및 효모를 연구했다. 이와 달리 오랫동안 식물로 분류되어온 버섯은 한국식물학회, 한국임학회와 같은 학회 소속의 연구자들에 의해 연구되었으나 일회적이었고 그 수도 극히 적었다 [5]. 농촌진흥청에 버섯 연구자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학회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이처럼 균학은 새로이 등장하는 미생물학에서도 아직은 독립적인 체계를 갖추지 못했고, 특히 그중에서도 버섯 연구는 매우 저조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김삼순이 가장 먼저 뛰어든 연구주제는 버섯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연구 경험을 가지지 않은 버섯 연구에 왜 나섰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국가적 관심과 지원이 컸던 점을 하나의 요인으로 들 수 있다. 정부는 1965년 <양송이 생산 수출 확대계획>을 세워 전국적으로 그 재배를 장려하고 있었고, 이 점은 그가 작성한 연구보고서에서도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1967년에는 농촌진흥청에 양송이 시험연구를 전담하는 응용균이과(應用菌理科)를 개설했다. 양송이는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과 새마을소득증대사업의 주요 전략품목으로도 지정되었다 [5,11]. 한국에서 표고와 함께 양송이를 재배하는 사회적 열의가 부쩍 높아지고 있었지만, 느타리는 여전히 그렇지 않았다. 이에 착안하여 그는 일본에서 굴버섯으로도 불린 느타리 우수 균주를 들여와 시험연구를 수행했다 [4].

김삼순이 느타리 연구를 추진한 것은 1968-69년 두 해에 걸쳐서였다. 각각 과학기술처와 문교부로부터 연구비 지원을 받았다. 그에 앞서 국내에서도 몇몇 선구적 연구자들이 느타리 연구를 추진하고 있었다 [12,13]. 대부분은 일본의 자료에 의존하여 원목재배에 치중한 시험연구를 수행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한국은 산림 황폐화로 버섯 재배에 필요한 원목이 크게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에 반해 김삼순은 일본의 최신 정보를 참고하되 창의적인 앞선 연구를 시도하고자 했다. 그는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한 현실적인 재배법에 주목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상반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1차 연도는 느타리를 한국에서 실제로 재배 가능한지를 밝히는 연구를 벌였다. 이미 알려진 원목재배 외에 사과상자를 비롯한 가마니, 병류, 흙 등을 이용한 재배법을 시도했다. 이때 인공배지는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왕겨, 톱밥, 쌀겨를 이용하여 만드는 것이었다. 그 비율은 각각 2 대 4 대 1이 우수했고 특히 4개월 발효시킨 경우가 가장 탁월했다. 이러한 인공배지를 이용한 종합연구로 구체적인 실험자료까지 얻어 성공 가능성을 제시한 경우는 국내는 물론 일본까지 포괄해도 그가 처음 시도한 것이었다 [14]. 그리고 2차 연도에는 전국의 여러 지역에서 느타리에 대한 농가 시험 재배연구를 실시했다. 종균의 배양과 공급을 위해 유리병과 폴리에틸렌병(제작품)을 이용하여 그 적합도 실험이 이루어졌다. 느타리는 전국 어느 곳이든 재배가 가능하고 실제 재배시험을 통해 양송이보다 20-25% 수량이 많다는 점을 보였다. 더구나 느타리는 양송이를 재배할 때의 원료와 시설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으므로 서로 병행 재배할 수 있다는 장점도 내세웠다 [15].

그는 느타리에 대한 연구성과를 널리 알리고자 노력했다. 먼저 그가 속한 서울여대 학장 고황경을 통해 수확한 느타리를 영부인 육영수에게 보냈고 청와대에 가서는 설명까지 했다 [4,16]. 다음으로는 국가 차원에서 버섯 보급연구를 주도하고 있던 농촌진흥청에도 연구성과를 알렸다. 그는 느타리 종균을 제공하고 연구보고서도 소개하는 등의 기여를 했다. 서로 만남을 가진 1970년부터 농촌진흥청 균이과에서는 느타리 연구팀이 구성되어 보급연구를 본격적으로 벌였다 [4,17]. 나아가 그가 연구한 느타리는 대한무역진흥공사에서 개최한 수출 아이디어 공모전에도 선정되어 새로운 유력 수출품목으로 기대를 모았다. 이때부터는 느타리를 전문적으로 다룬 도서도 출간되었다 [18]. 이처럼 그의 과학연구가 느타리 보급의 중요한 돌파구가 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한국의 전통 장류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특히 그는 멘토로 삼은 한자와가다루었던 낫토(natto)균에 대해 연구했다. 이는 청국장을 만드는 균주였다. 국내에서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우수 균주 분리와 이 균주들의 콩 단백질 분해 등에 대한 조사연구가 이루어졌거나 추진되고 있었다 [19,20]. 그는 상당 기간 연구를 수행하여 재래식 메주에서 단백질 분해력이 강한 효소를 분비하는 균주를 얻었고 이를 Bacillus natto MI-33으로 불렀다. 이 균주는 30-35℃ 56시간, 즉 낮은 온도에서도 단시간에 삶은 콩을 발효하여 청국장을 만들었다. 기름을 짜내고 남은 대두박으로도 우수한 청국장을 제조할 수 있었고, 대두로 만든 것과 비교해도 성분과 향미의 차이는 없었다. 그에 반해 우수 균주를 접종하여 발효한 개량식과 자연 발생균을 이용하여 제조한 재래식 간에는 그 차이가 작지 않았다. 즉, 개량식이 단백질 분해가 빨라 아미노산 생성이 많고 향미도 훨씬 우수하여 맛이 좋았다. 이렇게 그는 대두로 기름을 짠 나머지를 가지고도 우수 균주를 이용하여 맛있는 청국장을 경제적으로 제조하는 개량방법을 제시했다 [21].

그는 토양에 존재하는 균류도 연구했다. 다른 나라에서 활엽수림이나 침엽수림 토양 균류는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죽림 토양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대나무로 유명한 담양 출신인 점을 살려 그는 국내외 최초로 이에 대한 탐구를 시도했다. 그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다룬 발효공업에 쓰는 아밀라아제를 생성하는 균류 중 특히 조균류(藻菌類, Phycomycetes)를 조사하기로 했다. 전남 담양을 포함한 전국 3곳에서 채취한 토양으로부터 균주를 분리하고 이들의 아밀라아제 생성력을 조사했다. 조균류(현재 접합균류로 통칭편집자 주)로는 Absidia를 비롯한 7속을 얻었는데 그중에는 Mucoraceae 4종과 Mortierellaceae 3종의 순서로 종수가 많았다. 이와 비교하기 위해 아밀라아제 생성력이 강한 Aspergillus속을 분리하여 3종을 동정했다. 이들의 아밀라아제 생성력을 측정한 결과 Aspergillus oryzae와 A. niger가 각각 0.728과 0.548이었고 조균류 중에 높은 Gongronella sp.와 Rhizopus nigricans는 각각 0.445와 0.381로 나타났다. 조균류 중에서도 아밀라아제 생성력이 비교적 강한 종이 다수 있다는 사실이 그에 의해 밝혀졌다. 이 연구에서 비교를 위해 표준 종으로 일본에서 가져온 Aspergillus oryzae가 0.344인 것에 비춰보면 한국 죽림 토양에서 분리한 A. oryzae는 무려 그 2배를 넘어설 만큼 놀라운 수치를 보여줬다 [22].

초기 김삼순은 미생물의 응용연구에 집중했다. 서울여대 미생물연구소를 세워 그곳을 중심으로 소규모 연구그룹을 꾸렸다. 그가 관심을 기울인 연구주제는 느타리 인공재배, 개량식 청국장 개발, 발효공업을 위한 균류 조사연구 등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느타리 연구는 그의 연구성과를 계기로 정부 차원으로 확대되어 그에 관한 개발연구와 농가 보급의 효시가 되었다.

3. 농촌 근대화와 과학연구의 다변화

“근대화를 가장 짧은 말로 정의를 내린다면 과학화 합리화시키는 것이다. 농업을 과학적으로 경영함으로 생산을 늘리고 그 외의 모든 생산수단과 생활방법을 합리화시켜서 물자에 있어서나 인간의 정력에 있어서 모든 낭비를 절약하고 능률을 올린다면 살기 좋은 농촌이 나타날 것이오.” [23]

그를 초빙한 고황경 서울여대 학장은 여성과 농촌 교육에 관심이 많은 사회학자였다. 서울여대가 1961년 설립될 때 가정학과와 농촌과학과가 만들어졌다. 대학 창립 이래 농촌 발전이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고, 이를 위해 ‘여성 고등교육기관으로서는 세계에서 유일한 농촌과학과를 창설했다’고 자평했다. 농촌의 근대화에 관한 연구를 선도할 농촌발전연구소를 1965년에 대학에 세운 것도 그였고 학장이 소장까지 겸직할 정도로 열정도 컸다. 연구소의 주요 기능은 연구와 훈련으로서 농업생산, 생활개선, 주민교육 등을 포괄했다. 한국에서 농업 및 농촌 관련 연구소가 작은 규모의 서울여대에 일찍이 세워진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24].

김삼순은 서울여대 교수 임용과 함께 1968년 농촌발전연구소 연구부장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자 연구소는 연구체제를 내실 있게 갖추려고 했다. 1972년 김삼순을 연구부장으로 재임명하고 [25] 다수의 연구원을 모집하여 충원했다. 이때부터 농촌발전연구소는 교육에서 연구로 그 활동의 중심을 바꾸어 나갔다. 1971-73년까지 그는 문교부 학술연구조성비를 연달아 지원받아 재정적인 안정을 꾀했다 [26]. 1974년부터는 『농촌발전연구총서』라는 학술잡지를 정기적으로 발간하며 연구소에서 수행한 연구성과를 게재했다. 이 연구소는 최고의 과학연구자를 간판으로 내세우며 대학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운영되어 나갔다.

그가 관심을 주되게 기울인 사업은 미생물과 관련한 연구활동이었다. 당시 새마을운동이 내건 농촌 생활개선과 관련하여 과학연구를 추진했다. 그중의 하나는 농가의 소득증대 및 근대적 식생활 자원이 될 수 있는 버섯에 대한 조사연구였다. 그는 1973-74년에 걸쳐 메이지대학 농학부 초청을 받아 연구교수로 일본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이때 그가 목표로 삼은 것은 “일본의 식용버섯 실태조사”를 관련 기관 및 인물을 빠짐없이 방문하여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이었다. 일차적으로 그는 오카야마(岡山)현 농림시험장과 교토대학 하마다(浜田稔) 교수를 방문해 송이(Tricholoma matsutake) 연구현황과 저장가공 등을 파악했다. 농림성 임업시험장에 가서는 버섯에 관한 문헌을 상당히 구했으며, 돗토리(鳥取) 버섯(菌蕈)연구소에서는 선도적인 버섯 연구상황을 상세히 둘러보았다. 그는 일본발효학회가 개최하는 학술대회에도 참석했는데, 그 일부로 열린 <버섯의 인공재배 심포지움>에서는 담자균의 배양, 분화, 특성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27,28].

특히 그는 도쿄 농림연금회관에서 열린 임업시험장 아오시마(靑島淸雄)의 강연으로부터 최근 일본의 식용버섯 현황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주요 내용으로, 표고(Lentinula edodes)는 일본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의 하나로 재배와 원목의 육성도 동반해서 추진되고 있었다. 맛버섯(Pholiota nameko, 나도팽나무버섯이라고도 불림)은 일본인이 가장 즐겨 먹는 버섯의 하나로 자국 내의 수요가 많고 본업으로 재배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었다. 팽이(Flammulina velutipes, 팽나무버섯이라고도 불림)는 병에서 재배하고 있는데 맛버섯 못지않게 애용되는 중이었다. 느타리(Pleurotus ostreatus, 굴버섯)는 인공시메지라는 상품명으로 불리며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잿빛만가닥버섯(Lyophyllum decastes; 이명 Tricholoma conglobatum)은 일본인들이 송이 다음으로 좋아하는 고가의 버섯으로 향이 송이라면 맛은 맛버섯과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목이(Auricularia auricula-judae)와 흰목이(Tremella fuciformis Berk)는 말려서 국내외로 판매하고 약용으로도 쓰이는 상황이었다. 양송이(Agaricus bisporus)는 예전에는 수출이 잘 되었으나 최근에는 대만 및 한국에 밀려 포기상태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는 일본의 국민소득과 국민보건에 기여하는 9개의 대표 버섯 품종을 소개했다 [27,28].

김삼순은 일본에서 돌아오자 송이버섯 연구에 착수했다. 송이는 인공재배가 안 되고 오직 자연에서만 채취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 대부분이 수출되어 일반인들은 맛조차 볼 수 없는 진귀품이었다. 그 이유는 죽은 나무에서 자라는 다른 버섯들과는 다르게 송이는 소나무 실뿌리와 외생 균근(菌根)을 형성하며 자라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버섯 가운데 번식이 가장 까다로운 것이 송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오래전부터 일본에서 활발히 이루어져 왔음에도 그 증산기술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한국은 뒤늦은 1970년 이래로 농촌진흥청 식물환경연구소(이후 농업기술연구소로 개편), 산림청 임업시험장, 그리고 서울여대 농촌발전연구소가 조사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현실적인 방안으로 여긴 송이의 증산에 초점을 맞추었다. 버섯의 풍흉은 지역별 기상조건과 소나무숲의 환경요인 등이 영향을 미치므로 그에 대한 전국적인 기초조사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최근에 발표된 일본의 이시가와(石川達芳)의 연구가 중요 참고자료로 활용되었다 [29,30]. 제1보는 송이 생산량이 많은 강원과 인접한 충북을 우선 대상지역으로 삼고 연차적으로 확대해 나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에서 연구된 송이의 발생과 그 조건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한국 사례를 논의할 때 준거 및 비교 대상으로 삼았다. 송이 발생에는 온도, 습도, 강우의 요인이 커 그 균사의 발육은 땅의 온도가 18-20℃일 때 가장 적절하고 땅의 습도가 낮은 편이라 공중에서 충분히 보급되어야 좋다고 한다. 무엇보다 강우량이 영향을 크게 미쳐 6-10월의 장기간 강우가 송이의 작황을 좌우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송이 생산량은 1970년 약 192톤을 정점으로 하락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지역별로는 경북과 강원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 뒤를 충북과 경남이 잇고 있었다. 강원도는 양양, 명주에서 많이 생산되었지만 양양의 경우도 면적 10,761ha에 26,068kg 생산으로 ha당 2.42kg에 불과했다. 충청북도는 단양에서 상대적으로 생산이 많이 이루어졌으나 단위 면적당 생산량은 0.09kg으로 강원에 비해서도 아주 낮았다. 결론적으로 강원도의 송이 전망은 희망적이나 토양 검사를 계속하여 약간의 인공적 조성사업이 필요하며, 충청북도는 면적에 비해 경사가 심해 송이 증산사업은 바람직하지 않아 속리산 등 새로운 지역의 물색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31].

그 직후에는 야생 버섯의 인공재배 연구에도 힘을 쏟았다. 국내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표고, 느타리는 물론 팽이, 먹물버섯으로도 그 대상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버섯으로 1977-79년 수집 분리한 균주 중 호기성이 좋고 생산성이 높은 검은비늘버섯(Pholiota adiposa), 참버섯속 버섯(Panus rudis), 난버섯속 버섯(Pluteus sp.)을 식용으로, 불로초(Ganoderma lucidum)를 약용 및 관상용으로 연구했다. 국내에서는 처음 연구하는 야생버섯들로 식용 야생버섯의 대상을 한층 넓히기 위한 것이었다. 재배 방법은 다루기 쉽고 저렴한 톱밥 배지를 이용함으로써 실용성과 경제성을 동시에 높이려고 했다. 시험연구 결과 검은비늘버섯과 난버섯속 버섯, 불로초는 포플러톱밥 배지에서 자실체를 얻을 수 있어 인공재배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참버섯속 버섯은 참나무톱밥 배지에서 자실체를 얻을 수는 있었으나 육질이 질겨 식용으로의 재배는 적절치 않다고 보았다 [32]. 이 연구는 다른 균학 연구자들에 의해 이어져 나갔으며, 특히 불로초(영지버섯) 연구는 그에 의해 선구적으로 시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관심을 기울인 또 다른 연구는 균류는 아니지만, 메탄가스 생성균에 대한 것이었다. 1973년 석유파동으로 에너지 문제는 초미의 국가적 과제로 떠올랐다. 예전부터 한국에서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던 생물 부산물을 이용한 메탄가스 생산에 대한 관심도 부쩍 커졌다. 정부는 새마을 지원사업으로 가축 분뇨 및 농산물 폐물을 연료로 이용하는 농촌 연료 근대화를 폈고, 이에 따라 메탄가스의 농가 보급을 위한 시험연구가 농촌진흥청 주도로 활기를 띠었다. 그는 메탄가스 연료화를 위해서는 ‘고능력의 메탄가스 생성균’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이 연구를 국내에서 처음 추진했다. 이미 앞서서 성과를 축적하고 있던 일본의 연구 경험을 기초로 연구계획을 세웠다.

이 연구의 목적은 메탄가스 발생 능력이 우수한 균주의 특성을 밝히고 분리 동정하여 보급하는 데 있었다. 전국 6곳에서 소, 말, 닭 배설물을 수집하여 메탄가스 발생균을 분리하고 배지에서 메탄가스 발생시험을 거쳤다. 배지는 합성배지, 고구마박(粕), 인분, 계분, 우분 등을 다양하게 이용했다. 1차 시험연구를 거쳐 얻은 130 균주를 대상으로 2차 시험연구를 한 결과 메탄가스 발생이 우수한 균주, 즉 H-17(충남 부여 계분), C-71(경남 김해 우분), C-15(경기 안양 우분) 3개를 찾아냈다. 이 균주는 형태 조사, 배양시험, 생리시험, 발육 최적온도, 사멸 온도, 최적 pH, 가스발생 최적온도 등을 체계적으로 조사하여 그 특성을 파악했다. Bergey의 세균동정법에 따라 C-71은 Methanomonas methanica와 비슷하나 다른 2 균주는 확실한 판정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이들은 가스 발생 적정온도가 27-37℃이고 적정 pH는 7.0-7.6인 약알칼리성이었다. 기존 연구와 같이 단일 균주보다는 여러 균주가 섞인 혼합균주에서 메탄가스의 발생이 더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33].

또한 그는 균류를 이용하여 생물 부산물을 활용하는 연구에도 앞장섰다. 당시 정부의 축산업진흥정책에 부응하여 균주를 가축용 사료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시도였다. 먼저, 섬유소 분해 효소(cellulase)를 지니고 있다고 알려진 사상균을 대상으로 농산물 폐기물, 예를 들어 고구마순, 옥수숫대 등을 잘 분해하는 균주를 분리하고 이것에 사료효모의 조효소(粗酵素, crude enzyme)를 작용시켜 사료 제조시험을 실시했다. 이 사상균은 국내에서도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연구가 이루어져 이미 논문으로 발표된 적이 있었다 [34,35]. 그의 사상균 연구는 토양과 부식 식물체에서 섬유소 분해력이 우수한 균주를 분리하여 동정하는 과정에 관해서는 앞선 연구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고 실제로 찾아낸 균주도 비슷했다. 1차로 130 균주를 분리하고 이 중에서 우수 균주 3개를 동정했다. 다만, 이 우수 균주에 조효소를 첨가하여 섬유질을 지닌 실험용 사료재료에 처리하여 그 가능성을 타진한 점이 달랐다. 그 결과 약 30%의 섬유소 분해 효과를 지닌 것으로 나타났다 [36].

버섯의 일종인 담자균(Basidiomycetes)을 섬유소 및 각종 성분의 분해에 이용하는 연구도 착수했다. 버려지는 농산물의 폐물을 이용하여 생활에 필요한 당류를 얻거나 그 과정에서 생긴 균체를 가축 사료화하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이와 관련한 연구는 국내에서 시도된 적이 없었고 일본에서도 갓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여러 균주 중에서 버섯을 생산하는 느타리, 맛버섯, 팽이 3종을 가지고 연구를 수행했다. 이는 한국에서도 재배가 기대되는 것들로 ‘버섯 재배의 다목적 활용’, 즉 생산되는 버섯은 물론 그 부산물까지도 이용할 방안을 찾기 위해서였다. 실험방법은 농산물 폐물인 고구마줄기, 옥수숫대, 보릿짚에 톱밥류와 쌀겨를 섞고 그것에 균주를 배양하는 것이었다. 이 연구결과로 섬유소가 당류로 50% 가까이, 리그닌은 20-25% 분해되고 단백질은 처음의 3배로 증가하여 “조섬유의 농후 사료화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지었다 [37].

나아가 그는 치커리(Brussels Chicory)를 다용도로 이용할 연구도 수행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치커리가 소개되어 외화 절약을 위한 커피 대용품으로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유럽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는 치커리커피를 국내에서 개발하고자 치커리 재배법과 그 뿌리를 이용한 커피 제조법을 연구한 서울대 생약연구소 홍문화의 성과가 1974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이듬해에는 수입 약초를 연구개발 해온 한국수입약초재배연구소(소장 박화목)가 치커리 뿌리를 서독으로 본격 수출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에 대해 그는 치커리의 잎과 뿌리를 더 다양하게 활용할 새로운 방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가 착안한 아이디어는 치커리를 연화하여 그 활용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치커리를 가을에 수확한 후에 그 뿌리를 비닐하우스의 사질토양에 심어 연화 과정을 시험한 결과 20℃ 근처에서 뿌리가 유지되며 잎이 가장 잘 자라는 것으로 확인했다. 연화 전후의 성분도 섬유함량만이 증가할 뿐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부터 얻어진 잎은 쓴맛 없고 방향성을 지닌 샐러드용 야채로 적격이어서 말하자면 일 년에 잎을 두 번 이용하게 되는 셈이었다. 탁주용 전분원료의 1/3을 치커리 뿌리로 대체하여 발효시키면 전분원료도 절약하면서 방향성과 약간 쓴맛을 지닌 약(藥)탁주가 된다는 것이었다. 치커리 뿌리를 볶은 후 물을 넣고 끓이면 재래식 숭늉맛과 비슷하고 보리차보다 향긋한 우수한 대용차가 되었다 [38].

한편, 그는 대중의 과학이해를 위해서도 힘쓴 적이 있었다. 1975년 3월 일본에서 홍차버섯이 대중잡지에 알려지며 만병통치약으로 인기를 끌었다.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어느 내과 의사가 이 홍차버섯을 복용한 결과 효과가 좋다며 소개한 것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39]. 한국으로도 그 소식이 즉시 전해지며 국민들의 깊은 주목을 끌어 홍차버섯을 파는 백화점 식품부는 야단이 났고 시중에는 홍차가 동이 날 정도였다 [40]. 그러자 만나는 사람마다 버섯 전문가로 알려진 그에게 홍차버섯에 관해 물었다. 이때 그는 전문가로서의 의견과 당부의 말을 과학계, 주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그는 스위스 과학자가 잘 정리한 1백여 년에 걸친 방대한 문헌자료를 서둘러 입수하기도 했다.

그는 먼저 홍차버섯이 무엇인지 그 실체부터 정확히 소개하고자 했다. 이는 소련과 그 주변 나라들에서 유행하며 차균(茶菌)으로 불리던 것이 일본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차를 홍차로, 균을 버섯으로 번역함으로써 홍차버섯으로 불리게 된 것이었다. 이는 설탕을 넣은 갈색의 홍차 속에 균을 접종하면 해파리 같은 균체가 생기고 그 배양액은 달고 시다는 특성을 보였다. 그 모양이 버섯과 같아서 더 그렇게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주된 실체는 사실은 버섯이 아니라 일종의 세균인 Acetobacter xylinum과 다른 효모들의 공생체였다. 대중들에게 이 홍차버섯은 청량음료를 넘어 위장병, 고혈압, 심장병, 전염병, 가축병 등에 관한 만능의 치료약으로도 알려졌다. 일본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결과가 1971년부터 발표되었다. 서로 다른 나라들에서 가져온 균주들을 동정한 결과 초산균인 A. xylinum은 공통으로 존재했으나 효모의 종류는 지역 및 환경별로 서로 달랐다. 이러한 이유로 다른 나라에서 특정 효과가 있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도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었다. 끝으로 인체에 대한 실험연구가 이루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홍차버섯에 과도한 기대를 하지 말고 건강음료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41].

이 시기 김삼순은 정부가 추진하는 농촌 근대화와 관련한 과학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그가 서울여대 농촌발전연구소에서의 연구사업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버섯을 비롯한 미생물의 응용연구를 중심으로 하되 농촌주택 개량, 가축사료 개선, 채소 다목적 이용 등도 다양하게 포함했다. 새마을사업이 정부의 지원 속에 활발히 추진됨에 따라 미생물을 중심으로 한 과학연구도 그와 관련지어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자 했다. 이 과정은 연구주제가 계속하여 바뀌어 나간 것에서 보듯 불안정하고 단절적이기도 했다.

4. 균학 연구집단 형성과 버섯도감 발간

“우리 한국균학회가 장차 해야 할 일들이 학회지 발간 외에도 산적하고 있으나 우선 서둘러야 할 일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한국산균류도감이 없다. … 이것을 가능한 짧은 시일에 편찬하려면 회원들의 분담에 의하는 연합에 의한 재료 수집조사의 촉진과 뭉쳐진 힘만이 요소가 될 것이다.” [42]

1970년대 들어 김삼순은 균학 관련 학술단체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한국의 균학이 세계대열에 합류하여 발전하려면 학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일본을 방문했을 때 그곳 지인들도 권유했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1956년에 일본균학회가 세워져 운영되고 있었고 1971년에는 영국에서 40여개 나라의 균학연구자들이 참가한 제1회 국제균학회의(International Mycological Congress)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에 자극받아 그는 한국에서 균학회 설립에 나섰으며 [43] 그의 과학연구 정체성도 미생물학에서 균학으로 바뀌어 나가게 되었다.

당시는 과학기술 학회들이 활발히 생겨나고 있을 때였다. 1971년 최형섭이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임명된 이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 대한 정부의 재정 지원이 급증했다. 무엇보다 이듬해부터 회원 학회들의 학술지 발간과 학술발표회 등을 지원하는 학술활동 사업비가 많이 늘어났다 [44]. 반면에 학회의 증가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과학계의 분위기도 공존하고 있었다. 균학을 부분적으로 포함한 대한미생물학회와 한국미생물학회가 1946년과 1959년에 세워져 활동 중이었고 응용 성격의 한국산업미생물학회도 이 무렵에 설립 준비를 하고 있었다 [45,46]. 이는 연구자들이 많지 않은 미생물 관련 학회의 난립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마침 김삼순이 근무하는 서울여대 식품영양학과에 1971년 균학 전공자 이지열이 신임교수로 들어왔다. 그는 경희대 생물학과를 졸업한 후 교사로 있으면서 버섯 연구경험을 쌓았고 일본 도쿄교육대학으로 유학가서는 균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국내의 몇 안 되는 전문가였다 [5,47]. 서울여대에 합류하면서 그는 균학회 설립에 필요한 사무적인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김삼순을 비롯한 서울대 농대 정후섭과 서울대 약대 김병각 등이 균학회 설립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다.

한국균학회 창립총회가 1972년 12월에 열렸다. 회원으로 77명이 참여했는데 그중 서울여대 9명, 농촌진흥청 14명 외에 약학계 12명, 농학계 13명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회원 명단을 보면 초기부터 여러 명의 일본인 균학자들이 외국회원으로 참여했다. 한국 균학계는 초기부터 일본 연구자들과 학술교류를 활발하게 해나갔다. 전반적으로 참여 회원은 균학회 설립을 주도한 3인 그룹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았고 그것에 농촌진흥청 소속의 연구자들이 합류한 것이었다 [48]. 균학회 설립을 계기로 참여할 학회가 마땅치 않던 버섯 연구자들이 대대적으로 합류한 것이었다. 이는 한국균학회를 다른 미생물 관련 학회와 차별화시키는 주요 지점이 되었다.

초대회장으로 선출된 김삼순은 한국균학회가 자리를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1973년부터 학술지 『한국균학회지』가 정기적으로 발간될 수 있도록 재정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했다. 같은 해에 국제균학협회에 가입했고 1974년에는 여러 논란과 반대를 이겨내고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단체회원으로도 승인받았다. 월례회와 학술대회, 그리고 기존 학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버섯 공동채집회, 외국학자 초청 강연회 등의 사업도 활발히 추진했다. 한국산 균류도감을 학회 차원에서 공동으로 편찬하는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42,49]. 한국균학회가 빠르게 안착한 데에는 1976년까지 회장을 재임한 김삼순의 헌신이 큰 몫을 차지했다.

초기 한국균학회는 모든 균류를 망라하지만, 특히 버섯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학회 주도 인사들이 버섯에 관심이 많았던 데다가 농진청에서 버섯 연구자들이 대거 합류한 결과였다. 당시 정부는 버섯 재배를 국가적 사업으로 장려하고 있었으므로 균학회 입장에서는 버섯 연구를 통해 균학의 학문적, 사회적 가치를 효과적으로 높일 수도 있었다. 학술대회나 강연회에서 버섯이 종종 다루어졌고, 『한국균학회지』에는 버섯 연구성과가 가장 많이 실렸다 [5]. 이러한 학문적 특징은 다른 미생물 관련 학회와는 확연히 차이 나는 모습이었다.

1977년 학회 총회에서는 수백 종에 이르는 버섯에 대한 우리말 이름짓기에 혼란이 발생하여 교육과 연구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는 판단으로 김삼순의 발의로 그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듬해에 한국균학회에 우리말 버섯이름의 통일안과 원색 버섯도감을 만들 위원회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 위원회는 학회 소속의 버섯 전문가 13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김삼순이 위원장을 맡으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논의 끝에 <한국말 버섯 이름 통일안>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기록종 버섯 190속 588종을 보고했고 그 이름을 통일했다 [16,50].

그 주요 내용은, 먼저 기본종(type species)의 우리말 또는 학명을 속명으로 정하고 그 이름을 전 종명에 넣기로 했다. 이때 속명과 과명은 같은 말로 통일하여 단순화시켰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버섯 이름, 그 주요 사례로 송이, 느타리, 목이 등은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름을 단순화하면서 분명하게 하여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기 쉽도록 표준말 문법에 맞춰 기재하되 동종이명인 것은 엄선하여 괄호 속에 한 가지만 넣기로 했다. 느타리과를 새로이 설정하며 독버섯은 독성의 방식으로 표시했다. 끝으로 기본적 분류체계는 Rolf Singer(독일, 균학자), 이마제키(今關六也)와 혼고(本鄕次雄) 등의 것을 준용한다는 것이었다 [51,52]. 이에 바탕하여 노란갓벚꽃버섯, 모래꽃만가닥버섯, 흰삿갓깔때기버섯, 여우꽃각시버섯, 족제비눈물버섯, 키다리끈적버섯, 마귀광대버섯(독성), 비단그물버섯, 푸른주름무당버섯, 흰꾀꼬리버섯, 흰턱수염버섯, 말굽잔나비버섯, 부채메꽃버섯 등과 같은 멋진 버섯 이름이 만들어졌다.

김삼순이 버섯 분류연구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이때부터였다. 이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는 두 가지 사실을 크게 인지했다. 하나는 한국 균학에서 버섯 분류에 대한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체계적인 분류에 기반한 새로운 버섯도감의 출간이 절실하다는 점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늦은 나이에 기초적인 버섯 연구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때는 균학회 버섯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버섯도감을 만들어 빠른 기간 안에 출간하는 집단연구 방식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무렵 버섯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진 연구자가 등장했다. 건국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1976년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농촌진흥청 균이과 소속의 김양섭이었다. 학위논문은 산림생태계의 공생버섯인 한국산 광대버섯 속의 분류에 대한 것이었다 [53]. 김삼순은 농촌진흥청에 요청하여 그를 소개받고 버섯도감 집필을 위한 공동연구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김양섭은 한국균학회의 우리말 버섯이름 통일안 위원회에도 위원으로 참가한 적이 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버섯도감 출간 준비를 위해 김삼순은 버섯 분류학을 체계적으로 익힐 목적으로 그를 1981년 일본으로 파견했고 연구생으로 6개월 체류하는 비용 일체를 지원했다 [16]. 그가 간 곳은 시가대학(滋賀大学) 혼고 연구실로 한국의 균학 연구자들과 친분을 맺고 교류하던 버섯 분류학의 산실이었다.

김양섭은 혼고 연구실에서 최신의 버섯 분류체계를 배웠다. 혼고는 서구의 분류학을 근간으로 삼아 이마제키와 공동으로 『원색일본균류도감 1-2』 (1979) 등의 책을 출간한 적이 있었다. 그의 버섯 분류체계는 서구의 최신 성과를 반영하여 국제적 기준을 따르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혼고 연구실에서 광학 및 전자현미경을 이용하여 버섯의 미세구조를 관찰하는 방법을 배웠다. 현미경의 정밀한 조작과 그를 이용한 버섯 미세구조의 관찰, 그 성과의 분류체계 반영 등 새로운 기법을 중요하게 터득했다 [54]. 이로써 그는 버섯도감 작성에 필요한 최신의 분류체계와 연구방법을 습득했다.

김삼순이 버섯 분류연구에 참여하며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1978년부터였다. 균학회 차원에서 버섯 분류연구는 몇 년 전부터 공동으로 추진되어 시리즈 논문으로 발표되어오고 있었다. 그도 서울여대 이지열과 함께 1976년과 1977년 채집한 고등균류를 조사 연구하여 2종의 기생균주와 13개의 한국 미기록종을 확인했다. 1976년과 1978년 채집한 100여 개의 고등균류에서는 1개의 한국 미기록속과 10개의 한국 미기록종을 동정했다 [55,56]. 뒤이어 김양섭이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는 야생버섯의 인공재배를 위한 고등균류의 기초조사를 수행했다. 1978-79년 식용 가능한 야생버섯 33종을 확인하고 그중에 한국 미기록종 3개를 동정하고 한국말 이름을 붙였다. 1980년에 수집한 고등균류 중에서는 4개의 한국 미기록종을 확인하고 새로운 한국말로 명명했다 [57,58]. 나아가 버섯 분류를 정교하게 하기 위해 그 미세구조의 조사연구도 실시했다. 1982년 그는 김양섭과 함께 담자균 포자를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종간에 포자 외막의 구조가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밝혔고 이를 “분류의 한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제시했다 [59].

한국균학회에서 연구성과가 축적되어감에 따라 1980년대 중후반에는 새로운 버섯도감이 출간되었다. 1985년 이지열과 홍순우의 책은 서구의 연구자들이 세운 버섯 분류체계에 따라 구성되었다. 버섯의 형태를 주되게 고려하되 육안과 현미경을 사용하여 외부 형태와 내부 구조를 기술했고 현지 촬영이 불가한 경우는 표본의 사진으로 대체했다. 당시 보고된 한국산 7백여 종 가운데 523종의 버섯을 선별하여 수록했다 [60]. 1988년 이지열의 책은 분류체계를 다르게 하고 버섯의 종수를 618종으로 늘려 수록했다. 일반인들도 볼 수 있게 사진과 글을 한 지면에 함께 실었고 서술도 쉽게 했다. 특히 식용여부를 강조해서 표시했고 채집 시기와 장소를 밝혀 놓았던 점이 특기할 만하다 [61]. 이에 대해 김삼순은 “한국산 버섯류에 대한 저서 역시 몇 권 있으나 대부분이 외국의 도감을 그대로 인용한 부분이 많아 진정한 한국산 버섯의 참고서나 지도서가 드물다”고 평가했다 [62].

물론 김삼순은 한국의 다른 연구자들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균학회에서 마련한 한국말 버섯이름 통일안은 그의 저작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었다. 『한국균학회지』에 발표된 버섯 분류 동정에 대한 많은 연구논문은 직접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에 드는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시행착오를 결과적으로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또한 다른 연구자들이 발간한 버섯도감도 많이 참고되었다. 그 주요 내용이 참고자료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개선되어야 할 반면교사가 될 수 있었다. 나아가 그의 저작의 필자는 김삼순과 김양섭으로 되어 있지만 공동집필자로 한국균학희의 성재모(강원대), 신관철(충남대), 박완희(서울산업대), 민경희(숙명여대), 이경준(서울대) 5인이 참여했다.

김삼순은 1978년 전남 담양으로 내려와 자신의 호를 딴 취원응용미생물연구소를 세웠다. 1982년 무렵부터는 버섯도감 자료 작성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김양섭을 비롯한 연구자들과 전국을 다니며 버섯을 채취하고 그에 대한 사진과 자료를 확보해 나갔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버섯의 발생은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아 해에 따라 버섯을 찾을 수 없을 때가 있었고 발생 시기가 달라져 놓칠 때도 있었다. 버섯의 수명은 대체로 짧아 적기를 놓치면 한 해를 넘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진기술의 부족으로 귀중한 자료를 버리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이러한 사정으로 버섯도감 출간은 지체되어 1990년 81세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학술원에서는 출판기념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그의 저작은 한국에 자생하는 버섯류 중 많이 존재하고 몸체가 비교적 큰 325종을 선정하여 컬러도판으로 그 형태, 분포, 생태 등을 서술하여 수록했다. 주요 특징으로는, 첫째, 한국 자생 버섯, 그중에서도 식용 가능한 버섯들에 중점을 두어 일반인들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설명하고자 했다. 둘째, 서구 버섯 연구자들의 최신 분류체계를 참조하여 한국산 버섯의 신분류체계를 제시하고 버섯도감을 새롭게 구성했다. 셋째, 특히 일본 시가대학 혼고 연구실의 도움으로 광학현미경을 이용한 버섯의 미세구조 관찰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넷째, 한 면은 사진, 그 옆의 다른 한 면은 글로 구성하여 사진과 글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했다. 다섯째, 독성을 지닌 버섯의 부주의한 식용으로 인한 피해를 우려하여 식용여부를 밝혀 놓았다. 결론적으로 그의 저작은 형태적 특징을 기반으로 하는 당시의 버섯 분류체계를 미세구조까지 고려하여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이에 대해 한국균학회 회장을 역임한 서울대 교수 정후섭은 “우리나라 버섯 연구에 있어서 “원전(原典)”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63].

김삼순은 한국균학회 창립에 나서면서 자신의 과학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맞았다. 한국 균학계의 구심점이 됨에 따라 그는 대내외적으로 균학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특히 회장을 물러난 다음부터는 균학의 제도적 안착만이 아니라 그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도 나섰다. 특히 버섯의 분류 동정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표함은 물론 많은 사람의 노력과 장기간이 소요되는 버섯이름 통일안과 버섯도감을 만드는 일에도 뛰어들었다. 그는 후학 김양섭과 함께 버섯 연구의 기초가 되는 새로운 버섯도감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그는 응용은 물론 기초까지 두루 갖춘 균학자로서의 정체성을 뚜렷이 갖게 되었다.

5. 과학연구의 궤적과 과학적 정체성

“과학하는 여성이 많아야겠어요. 한 가정의 선생으로서 뿐만 아니라 여성이 과학에 관심을 가져야 나라가 발전하지요. 그리고 자연훼손, 생태계를 파괴하는 문제, 환경문제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해요.” [64]

한국에서 김삼순의 과학연구 궤적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1966-72년으로 그가 세운 서울여대 응용미생물연구소를 중심으로 교내 교수들을 모아 버섯, 청국장, 발효 등 미생물의 응용연구를 수행했던 시기다. 제2기는 1973-77년으로 대학 주도의 서울여대 농촌발전연구소에 기반하여 외부의 연구자들까지 합류시켜 미생물 연구를 주축으로 하되 농촌주택 개량, 가축사료 개선, 채소 활용방안 증진 등 다양한 연구과제를 수행했던 것을 특징으로 한다. 제3기는 1978-91년으로 그의 주도로 창립한 한국균학회의 버섯 연구집단과 협력하면서 균학, 그중에서도 버섯이름 통일안, 버섯분류 논문, 버섯도감 등 버섯의 기초연구에 몰두했던 시기다. 그는 죽는 날까지 과학연구에 올곧게 정진함으로써 과학 열정은 그의 삶을 남다르게 특징짓는 핵심이 되었다.

그가 초기에 추구한 연구분야는 응용균학이 아니라 사실은 응용미생물학이었다. 1966년 이래 그는 국가와 국민에 도움이 될 실용적인 과학연구를 수행하고자 했고 그 구체적 형태가 미생물의 응용연구였다. 이는 홋카이도대학 응용균학 강좌를 모방하는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변형과 개선을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낫토균의 실용적 연구는 그대로 쫓은 것이었지만 버섯 연구는 완전히 차별적인 것이었다. 정부가 근대화 사업을 펼치는 상황에서 과학연구의 가치를 내보이고자 다양한 연구주제를 넘나들며 부단히 힘썼다. 당시만 해도 연구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어려워 시의성 있는 연구주제의 지속적인 탐색이 과학리더로서는 불가피했다.

그는 사실 관련 연구경험이 없음에도 첫 느타리 연구부터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며 호평받았다. 이는 그가 기본적으로 연구경력이 풍부하고 우수하다는 점이 중요했으나 한편으로는 시의적인 연구주제의 탐색, 우수 연구자들과의 협력, 국제적 최신 성과의 습득, 해외 과학자들과의 네트워크 등에서 남다른 역량을 발휘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는 과학연구를 할 때마다 사회적으로 시선을 끌 연구주제를 선택하고 언제나 우수한 관련 연구자들을 합류시켰다. 국립공업연구소의 김기주, 서울여대의 이지열, 농촌진흥청의 김양섭은 그 대표적인 동료 연구자들이었다. 여기에 그는 해외, 특히 일본에서 이루어진 최신의 연구성과를 주되게 참고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삼아 연구를 진척시켰다. 필요할 경우에는 일본의 최고 전문가들로부터 조언과 도움을 받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과학연구의 지향을 응용미생물학에서 응용균학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그가 1972년 한국균학회 창립을 위해 나서면서부터였다. 균학이라는 단일 과학분야의 집단이 형성되어 감에 따라 그는 학문적으로나 대외적으로 한국 균학계의 구심점이 되었다. 한국에서 균학이라는 신생분야를 학문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는 과제를 앞장서서 짊어지게 된 것이었다. 1973년 학회지 창간사에서 그는 응용균학이라는 말을 쓰고 있고 1975년 무렵부터는 자신이 응용균학을 연구하고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여전히 응용을 강조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과학연구, 좁게는 균학 연구의 중요한 가치는 그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그가 균학에 깊이 관여할수록 응용보다는 기초연구로 방향을 선회하여 나갔다. 신생분야인 균학이 학문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응용균학 못지않게 기초균학도 중요하다는 점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말 버섯이름 통일안을 마련하고 결정적으로는 버섯도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부터였다. 한국균학회의 설립으로 균학자들과 그들의 연구성과가 많아졌지만, 그 학문적 기반은 여전히 허약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는 균학, 그중에서도 버섯 연구의 근간은 우수한 도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스스로 이 일에 뛰어들어 장기간 노력 끝에 중요한 저작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여러 우수한 과학적 성취를 거두었다. 다른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거둔 것이긴 하나 그의 남다른 아이디어와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예로서, 느타리의 인공재배 성공, 야생버섯/영지버섯의 시험재배 연구, 한국균학회 설립과 해외교류, 버섯 연구집단의 형성, 과학저작 『한국산 버섯도감』출간 등은 대표적 성과들이었다. 이러한 과학적 성취를 보면 모두가 미생물이 아닌 균학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주요 업적은 균학과 관련이 있고 이 점은 그의 과학적 삶이 응용균학을 추구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균학이 아니라 특별히 응용균학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그의 과학연구 지향이 응용연구에 있기 때문이었다.

버섯도감을 출간한 이후에도 그는 전남 담양에 취원응용미생물연구소를 세워 새로운 야생버섯의 인공재배는 물론 곰팡이를 이용하여 영양소 파괴를 최소화하는 각종 장류와 식초의 발효식품 연구에 매달렸다. 갈수록 악화되는 환경문제에 오래전부터 진지한 관심을 가지며 친환경 농법의 개발과 인간 삶에 필요한 논밭, 과수, 양봉 등을 종합적이고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입체농업(立體農業)을 추구하기도 했다. 버섯도감 후속편을 발간하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기울였다. 나아가 그는 서울 근교에 교육원을 설립해 여성 대상으로 장류를 포함한 과학교육을 실시하려는 계획도 야심차게 세웠다.

그가 지향한 과학연구는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환경이 조화로운 공존을 이루는 것이었다. 환경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은 이미 1975년 그의 인터뷰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그가 추구해온 응용미생물학, 응용균학은 이를 위한 중요한 과학적 접근이었다. 버섯과 곰팡이 연구를 통해 그는 인간과 동시에 환경에도 유익한 가치를 창출하고자 부단히 힘썼다. 과학연구는 인간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환경에도 이로운 것이어야 했다. 그 스스로도 검소하게 살며 먹거리에서 인스턴트나 가공식품을 멀리했다. 그가 세운 많은 계획은 진행 중이었으나 그의 남다른 과학 열정과 선구적인 생태적 사고는 주요 과학연구 성취와 맞물리며 새롭게 평가받아야 할 또 다른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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